<다크나이트>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역, 고담시티는 시카고 그 자체였다.
아무리 등장인물들이 고담시티를 언급해도, 익숙한 풍경과 장소와 건물들은
'사실 여기는 일리노이주 바람과 마천루의 도시, 시카고 입니다' 라고 속삭이듯이
또는 시카고야 말로 고담시티에 걸맞는 혼돈과 음모의 도시라고 귓속말을 건네듯이.
처음 <다크나이트> 프로젝트가 공개 되기 이전부터 DC와 마블을 비롯한 슈퍼 히어로컨텐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에 대한 기대가 무척 높았다.
<메멘토>에서 처음 만났던 그의 재능과 열정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배트맨 비긴즈>는 팀 버튼이 이룩해 놓은 고담시티를 싸구려 팬시제품으로 둔갑시켜버린
워너에 대한 배신감을 일소시키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배트맨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
속편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 설레이며 극장을 나설 수 있었다.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이제는 아무도 그를 넘어설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배우.
히스 레저는 결국 모두의 기대 이상으로 조커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준비와 계획 아래 자신만의 조커를 만들어냈다.
이런 단언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 조커였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 개봉판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촬영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주검이 되버린
그의 탓인지 편집본을 보는 동안 어딘가 톱니바퀴 한 뭉치가 빠져나가 버린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조커와 배트맨의 대립은 밍숭밍숭했고, 뭔가 더 보여줘야 할 법한 장면에서 감독은 현란한 편집으로
플롯을 흐지부지 일으켜 세우고 이야기는 종결을 향해 속도를 높여만 갔다.
여담이지만 조커 역할을 두고 애드리언 브로디가 캐스팅 마지막까지 히스 레저와 경합을 벌였다는데
<빌리지>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를 곱씹어 보면 '침착하게 미친' 조커역할에 더없이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었을까?
히스 레저의 죽음과 함께 그의 조커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도 구미가 당길텐데 ^^;
개봉수익을 위해 PG-13등급을 고수한 제작진의 선택이었을까?
<다크 나이트>는 최근 연이어 개봉되는 스튜디오 블록버스터와 비교했을 때
실제 화면에서는 그다지 직접적인 폭력이 많지 않다.
직접 보여주기보다는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한스 짐머의 스코어와 함께 묘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어쩌면 조커의 협박-선택지를 좁혀 나가는 것-이 위협적인 것은
고담시티라는 혼돈의 도시와 같은 맥락의 '예상할 수 없는 본질'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게리 올드만이 분한 고든 경감은 리암 리슨이 분한 라스 알 굴의 캐릭터처럼
갑자기 비열하고 추악한 악인으로 돌변할 것만 같았는데...<다크나이트>에서도 한결같이
청렴하고 소신있는 스테레오 타입의 정의파 경찰로 등장하는데는 질려버렸다.
특히 고든 경감이 죽은줄로만 알고 있던 가족과 만나 다시 투페이스의 협박에 끌려가는 장면은
하비-투페이스라는 캐릭터의 어설픈 면모를 재확인시켜주는데 급급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감독이 언급한대로 <다크나이트>의 진정한 주인공이 하비-투페이스라는 언급은
마케팅포인트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 제목을 <조커>로 바꾸어도 될만한 이 작품에서...
아론 액하트는 원래 꽤 좋아하는 배우였지만 너무 원작 코믹스에 가까운 특수효과를 생각했던 것일까.
투페이스로 변모한 이후의 백기사는 조커의 카리스마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속편에서 다시 등장해야 한다면 아론 액하트의 투페이스는 빠져주길...
아론 액하트의 연기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각본이 하비-투페이스를 그려내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70년대 필름누와르의 무드를 끌어왔지만, 백기사 하비 덴트는 애초부터 고담시티와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배트맨 비긴즈>와의 또다른 차이점을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잔재미랄까.
눈에 띄는 조연들중 이탈리안 갱스터 '마르니'는 줄리아 로버츠의 오빠로 더 유명한 에릭 로버츠.
B무비의 빛나던 스타였지만 역시 관록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하나의 비극적인 희생양 '갬볼' (최초로 why so serious?에 당하고 만 흑인 갱보스)는 무려
저주받은 실패작 '스폰'의 타이틀 롤 마이클 제이 화이트ㅠㅠ
프롤로그에서 멋지게 레밍턴을 난사하던 은행장역의 윌리엄 핀처는 이미 유명인이니^^;;
그 중에서도 더더욱 놀랍고도 반가운 얼굴이 있었으니...
바로 조커의 선택지를 깨버린 주역, 험상궂은 얼굴과 전신에 아로새겨진 타투의 포스만으로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든 죄수 호송선의 대부..."네가 하지 못한 일을 지금 해주지." 우왕ㅋ굳ㅋ
이분은 80년대를 풍미한 WWF의 악역스타 제우스님이셨다. 지금의 말랑말랑한 WWE를 보고 자란
어린이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85~86년의 썸머슬램이나 로얄럼블에서 이분의 치사한활약을 봤던 나로서는
정말 심장이 두근거리는 충격과 감동...자세한 정보는 Tony 'tiny' Lister로 구글링을 하시라.
성급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다크나이트>를 관람하고 엔딩크레딧이 끝나도록 스크린을 지켜보면서
다시한번 느낀 것은 팀 버튼의 <배트맨>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는지, 잭 니콜슨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연기를 했던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당연히 다음 편의 배트맨 무비를 준비하고 있겠지만 <다크나이트>가 아로새긴
명작의 찬사는 다시 돌려 받지 못할것이고, 팀 버튼의 <배트맨>을 넘어서는 배트맨 무비는 역시 다시 없을 것만 같다.
P.S
그건 그렇고, 마이클 키튼을 카메오로 출연시킬 생각은 없는걸까.
기왕이면 좀 마이너한 악당으로 등장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